"미쳤네요. 그들 모두 미친 것 같아요."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은 작가의 첫마디였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현지시간 10월 8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캐나다 시인이자 고전학자 앤 카슨(Anne Carson, 76)을 발표했습니다. 2024년 한강, 2025년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에 이어, 이번에도 형식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인 작가에게 영예가 돌아갔습니다.
국내에도 『빨강의 자서전』, 『녹스』 등 9권이 번역돼 있어 문학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입니다. 특히 한강 작가가 『녹스』에 추천사를 쓴 사실이 알려지며 더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앤 카슨은 어떤 작가인지, 무엇부터 읽으면 좋은지 한 번에 정리해 드립니다.

한림원이 꼽은 수상 이유
스웨덴 한림원은 카슨을 선정한 이유로 "고전 전통과 유희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현대 문학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밝혔습니다. 한마디로 수천 년 전 그리스·로마 고전을 오늘의 언어와 형식으로 되살려낸 작가라는 평가입니다.
카슨의 글은 장르로 분류하기가 어렵습니다. 논문으로 시작한 글이 에세이가 되고, 시처럼 보이는 글이 사실은 소설이며, 책 자체가 하나의 조형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시, 소설, 에세이, 번역, 학술 연구 사이의 담장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 그것이 카슨 문학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앤 카슨은 누구인가 — 시인이기 전에 고전학자
- 1950년 캐나다 토론토 출생. 고등학교 시절 라틴어 선생님에게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며 고전에 빠져들었습니다.
- 토론토대학에서 고전학 박사를 받았고, 1981년 박사 논문 제목은 『나는 미워하고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였습니다.
- 캐나다 맥길대, 미국 프린스턴대 등에서 고전문헌학과 비교문학, 창작을 가르친 교수이기도 합니다.
- 20권이 넘는 저서와 번역서를 냈고, 그리핀 시문학상을 두 차례 받았으며 맥아더 펠로십, 구겐하임 펠로십 등 굵직한 상을 휩쓸었습니다.
- 시각예술가인 남편 로버트 커리와 함께 2022년 아이슬란드 시민권을 얻어, 한 해의 상당 기간을 아이슬란드에서 보냅니다.

대표작 4편, 이것만 알면 대화가 됩니다
① 『빨강의 자서전』(1998) — 괴물 게리온을 상처받은 소년으로
카슨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긴 대표작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날개 달린 빨강 괴물 게리온을 현대의 상처받은 소년으로 되살려, 헤라클레스와의 사랑과 이별을 그렸습니다. 정확히는 '시로 쓴 소설'입니다. 캐나다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가 "몇 년간 이렇게까지 나를 흔들어놓은 글은 없었다"고 극찬했고, 전미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② 『녹스』(2010) — 오빠에게 바치는 상자 속 묘비명
1978년부터 2000년까지 22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오빠 마이클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하며 만든 작품입니다. 사진, 편지, 글 조각들을 오리고 붙여 아코디언처럼 병풍으로 접어 상자에 담은 독특한 형태입니다. 한림원은 "문학적이면서도 조각 예술에 가까운 독창적인 창작물"이라고 평했습니다.
③ 『남편의 아름다움』(2001) — 여성 최초 T.S. 엘리엇상
한 여성이 어린 시절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배신과 이혼을 겪는 과정을 29개의 장으로 그렸습니다. 각 장 첫머리에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시와 편지를 배치해 사랑과 배신, 아름다움의 의미를 묻습니다. 이 작품으로 카슨은 여성 최초로 T.S. 엘리엇상을 받았습니다.
④ 『에로스, 달콤씁쓸한』(1986) — 사랑은 왜 기쁨이자 고통인가
박사 논문을 바탕으로 쓴 첫 책입니다. 사포의 시와 플라톤의 철학 같은 고대 그리스 문헌을 읽으며, 사랑에는 왜 달콤함과 씁쓸함이 함께 있는지를 탐구한 에세이입니다.
한강이 『녹스』에 남긴 추천사
『녹스』가 국내에 출간될 당시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은 이런 추천사를 남겼습니다.
"밤을 들여다보는 책이 왜 이렇게 눈부신 걸까? 사무치게 진실한 것은 어둠을 꿰뚫는 빛이 되고 마는 것일까?"
두 노벨 작가가 '상실'과 '애도'라는 주제로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이번 수상 소식에 국내 독자들의 반응이 유독 뜨거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내 번역작 9권, 무엇부터 읽을까
| 작품 | 성격 | 이런 분께 |
|---|---|---|
| 빨강의 자서전 | 시로 쓴 소설 | 카슨 입문, 이야기가 있는 책을 원할 때 |
| 녹스 | 애도의 콜라주 책 | 상실을 겪었거나 책의 '형태'가 궁금할 때 |
| 남편의 아름다움 | 29편의 연작시 |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시로 읽고 싶을 때 |
| 에로스, 달콤씁쓸한 | 고전 에세이 | 사포·플라톤과 사랑의 철학에 관심 있을 때 |
| 플로트 / 플레인워터 / 짧은 이야기들 /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 실험적 산문·시 | 카슨 문체에 익숙해진 뒤 |
처음이라면 『빨강의 자서전』으로 이야기의 힘을 느낀 뒤 『녹스』로 넘어가는 순서를 추천합니다. 『에로스, 달콤씁쓸한』을 비롯한 4권은 출판사 난다에서 나왔고, 『녹스』는 윤경희 문학평론가가 번역했습니다. 수상 발표 직후에는 대출 예약이 몰리기 쉬우니, 도서관에서 읽으실 분은 미리 예약해 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파킨슨병 고백, 그리고 복싱 — 멈추지 않는 76세 작가
카슨은 2024년 8월 영국 문예지 '런던 리뷰 오브 북스'를 통해 파킨슨병 투병 사실을 밝혔습니다. 공책에 손으로 글을 쓰던 그는 "특히 괴롭고 민망한 증상 중 하나는 글씨체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치료를 위해 일주일에 세 번 복싱 수업에 나간다는 일상을 전했고, 같은 해 새 작품집 『Wrong Norma』(국내 미번역)를 내며 집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수상 소감도 '카슨답게'
수상 소식은 아이슬란드에서 바람 소리를 듣고 있던 중에 전해졌습니다. 그는 아이슬란드 공영방송 RUV 인터뷰에서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손으로 붙잡은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 "시는 아마 지금 산문보다 더 유용할 거예요. 시가 더 빠르고, 모두가 조급하니까요."
- "기본적으로 시는 간결해서 좋아요. 다만 호메로스는 예외예요. 호메로스는 간결하지 않거든요."
- 독자가 늘 것 같냐는 질문에는 "출판사는 그러길 바라겠죠. 제 책 표지에 스티커가 붙을 테고, 스티커는 도움이 될 거예요."

시상식은 언제? 상금은?
노벨상 시상식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립니다. 수상자는 메달과 증서, 그리고 상금 1,2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6억 1,000만 원)를 받습니다.
한눈에 정리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앤 카슨은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을 현대의 형식으로 되살려낸 캐나다 시인이자 고전학자입니다. 대표작은 『빨강의 자서전』, 『녹스』, 『남편의 아름다움』, 『에로스, 달콤씁쓸한』이며, 국내에 9권이 번역돼 있습니다. 한강 작가가 『녹스』에 추천사를 남긴 인연까지 더해져, 이번 가을 서점가와 도서관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시가 더 빠르다"는 그의 말처럼, 올가을에는 짧은 시 한 편으로 카슨의 세계에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
※ 연합뉴스·뉴스1·중앙일보·조선일보 등 2026년 10월 8~9일 보도와 스웨덴 한림원 발표 내용을 참고해 정리했습니다.